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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경험과 뇌를 일깨우는 자극

Written on 2025-11-30

여행을 다니다가 공포를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때마다 내 머리 속에 남은 공포의 감각, 그 흔적이 딱히 불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끔은 그리워지기도 한다.

오래전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버스가 목적지까지의 경로 중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뭔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잠이 깼다. 밖은 가로등도 없는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이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버스가 속도를 줄이더니 곧 멈춰섰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나 혼자밖에 없었는지 주위에선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들려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기관총 같은 것을 든 군인들이 군화소리를 내며 버스에 올라 탔다. 그리고 위압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그 때 순간적으로 공포감이 올라오며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이 버스 납치되는 건가, 저 군인은 제대로 된 군인이 맞나..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심상치 않게 들려서 공포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다행히 그냥 승객들의 신분증이나 여권 검사를 하고 끝나긴 했다. 창 밖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군인 차량과 경찰차 등이 줄줄이 깔려 있었는데 잘은 모르지만 무슨 사건이 터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검사를 마친 후 고압적인 태도의 군인은 나갈 때도 뭔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치고 나갔고, 버스는 곧 출발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결국 도착할 때까지 한 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동남아 국가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베트남 하노이에서였다. 현지인들이 모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길래 나도 스쿠터를 빌렸다.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마치 자신의 발처럼 사용해서인지 다들 무슨 곡예 하듯이 아슬아슬한 순간에서도 능숙하게 서로 피해가며 오토바이를 모는 재주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겁이 났지만 곧 사람들이 알아서 초보 바이커인 나를 알아서 피해준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나는 스쿠터 라이딩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타다가 어느덧 해가 지게 되었다. 밤이 되고 도로에 차도 없어지니 왠지 모르게 더 나아가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라 나는 더더욱 텅 빈 어둠 속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점점 차도 오토바이도 없어서 나도 모르게 속도를 더 더 올리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쿠터 말고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는 일반 오토바이를 빌릴걸 하는 생각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어느덧 주위에 아무도 없고, 라이트가 비춰진 곳이 아니면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컴컴한 어둠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에도 스마트폰과 구글 지도가 있어 꺼내 보았지만 인터넷마저 제대로 안잡히는 곳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 때 저 쪽에서 한 무리의 오토바이들이 보였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겁이 나서였는지 왠지 굉장히 불량(?)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한 바이커들로 보였다. 순간 공포에 식은땀이 흘렀다. 식은땀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그 때 처음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곳은 한국이 아니고, 어둠만이 깔린 이 곳에서 혹시라도 저 치들에게 잡혀 당해도 찍 소리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

바로 바이크를 돌려 미친듯이 액셀을 밟았다. 스쿠터라 속도가 그리 빠르게 나지도 않았지만, 하여간 단 한 순간도 떼지 않고 최대치를 밟고 그대로 달렸다. 사이드 미러도 안보고 무작정 달렸다. 한참을 달려 빛이 보이고 무심하게 길을 다니는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웃으며 거리를 지나다니는 곳까지 와서야 비로소 속도를 줄이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아무리 위험한 순간이라도 일상에서 목숨을 걱정할 정도의 공포를 느낄만한 일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분명 내 유전자가 만들어낸 뇌는 외부의 공포 상황, 목숨을 위협할지 모를 공포 상황에 대한 급격한 교감 신경 흥분 프로세스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평생 그런 프로세스를 작동시키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감각과 느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 때 느꼈던 공포의 느낌은 말 그대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고, 그게 방치되어 먼지가 쌓였을 뇌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고 깨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가끔씩 그런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즐겨 보고, 살인 혹은 전쟁의 참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영화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은근 찾아 보는 이유는, 아마도 머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바로 이 공포 감각을 주기적으로 깨워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금속 기구가 녹이 스는 것을 막기 위해 기름칠을 하고 꾸준히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원래는 사람들도 주기적으로 공포 자극을 받아야 뇌에 활력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리고 돌아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그 두 가지 상황에서 깊은 공포를 느꼈던 것은, 그만큼 내가 평생을 안전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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