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고 쉽게 불안을 느끼는 성향은 분명 뇌신경세포의 어떤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런 성향이 학술적으로나 임상적 진단의 측면에서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아직까지 이런 성향을 구분해낼 만한 기술과 학문적 연구의 성취 수준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사람들 중 이런 성향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과 탐구는 과거부터 계속 존재해 왔다.
또한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지는 성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같은 특성으로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보통의 사람들도 특정 조건 하에서는 상대적으로 평소보다 더 예민하고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심리 상담이나 정신과 임상 영역을 제외하고는 이런 성향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축적된 경험적, 학문적 지식과 통계를 비춰볼 때 이런 유형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동안 사회적으로 이런 성향에 대해 뚜렷이 인지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지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남들보다 쉽게 상처를 받곤 했다. 또한 스스로의 독특한 특성을 인정받지 못해 상처가 점점 더 덧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서' '의지가 약하고 노력을 안해서' 등등의 비난을 받는 일도 자주 발생하곤 했다.
그동안 어린 시절의 불완전한 환경과 부모의 정서적 학대 등이 개인의 성격이나 정서적 문제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예민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어느 정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과연 어디까지가 그런 주변 환경과 양육 환경의 문제인지, 그냥 타고난 부분이 더 큰 것은 아닌지 여부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혹독한 어린 시절을 경험했어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사는 사람들이 세상엔 훨씬 많으며, 어쩌면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환경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경험이 특히 악영향을 미치는 부류 역시 예민하고 정서적으로 여린 사람들, 즉 쉽게 불안에 빠지는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민한 성격은 뇌신경세포의 어떤 특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보통의 사람들보다 고기능성을 지니고 있지만만 쉽게 지치고 피로해지며 염증 역시 잘 일어나는 뇌신경세포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지는 성향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이같은 가설을 인정할 경우, 예민한 성격의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더 높은 기능을 수행하는 뇌신경세포를 갖고 있지만, 그만큼 이들의 뇌신경세포는 조금만 자극이 과해져도 쉽게 기능을 잃고 병적인 상태로 이행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예민한 사람들에 비해 같은 환경에 있어도 평소 받아들이는 자극의 정보량 자체가 적다. 또한 머리 속에서 처리할 데이터도 많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다양한 자극들 - 영상, 소리, 음식, 각종 쾌락 혹은 스트레스 - 에도 뇌신경세포가 쉽게 지치지 않는다. 그만큼 보통 사람들의 뇌신경세포가 더 튼튼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다소 둔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정신건강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둔하다는 것은 지능이 낮거나 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신경세포의 반응성 측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예민한 사람들은 똑같은 자극을 받을 경우 뇌가 훨씬 더 복잡하게 일하기 때문에, 생각도 많아지고 그들의 뇌신경세포 역시 금방 지치거나 쉽게 염증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건강도 보통 사람들보다 쉽게 나빠진다고 하겠다.
언뜻 듣기에, 그렇다면 예민한 사람들이 같은 양의 자극 데이터로 더 훌륭한 판단을 내리거나 더 정교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다. 예민한 이의 뇌신경세포가 다양한 자극이 물밀듯이 밀려올 경우 오히려 금방 지치고 망가지는 것 뿐이라면? 오히려 그런 상황에선 다소 둔한 뇌신경세포를 갖고 있어야 무수히 쏟아지는 자극 정보들 중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분류해서 쳐내는 것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비유를 들어보자. 찰흙과 물감을 이용해 어떤 인형을 만드는 과제가 주어진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인형이 좋은 인형인지 각자의 의견들을 큰 소리로 떠들고 있고, 또 한 편에서는 세계의 수많은 인형들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틀어져 있다. 그 속에서 예민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좀 더 섬세한 감각으로 찰흙과 물감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옆에서 떠드는 소리와 영상의 내용들이 자꾸만 귀에 들어와 처음 자신이 만들려는 작품에 대한 생각에 자꾸 영향을 미치고, 그러다 점점 뇌신경세포가 피로해져서 생각처럼 머리가 잘 안돌고 금방 에너지가 소진되어 결국 인형 제작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보통의 둔한 사람들은 옆에서 누가 떠들든, 영상이 틀어져 있든 말든 신경 안쓰고 그냥 처음 생각했던대로 대충 대충 만들어 어쨌든 뭔가를 완성해 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은 다소 투박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만들다 중단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의 둔한 사람들처럼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와 시끄럽게 튼 영상의 내용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역시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마치 SNS와 소셜 미디어가 범람하는 모바일 생태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과 같다. 다만 생물의 감각기관과 뇌의 작용 메커니즘을 통해 추정해보자면, 그렇게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뜨거운 물에 손을 댔을때 그 뜨거운 자극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탕을 먹었을 때 그 설탕이 흡수되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시각과 청각적 자극, 스트레스 역시 마찬가지다. 유형화된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얼마든지 -정신력으로- 차단할 수 있다고 쉽게 믿어버리지만, 그렇다면 시각 수용체와 시신경, 청각 수용체와 청신경, 스트레스 호르몬과 그 수용체는 대체 뭐하러 있겠는가. 내부 기전에 의해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거기엔 반드시 에너지가 들며, 그렇게 소모된 에너지는 공짜가 아니다. 그런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전 자체가 감각 세포와 그것을 처리하는 뇌세포에 어떤 식으로든 구조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다량의 자극을 받을 때 세포 수준에서 해당 자극의 영향을 차단하는 탈감작 기전이 있는데, 이런 기전들 덕분에 처음에는 생물이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이런 기전이 지속되면 결국 만성질환을 일으킬 가능성도 높아지게 된다.
여기서 잠깐 지적해야 할 것은, '예민함' '둔함'이 어떤 가치 판단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많은 자극과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더 뛰어난 것이 아니며, 둔하다고 해서 정말로 둔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엄밀히 말해 예민함과 둔함은 각 상황에 맞게 적응된 속성으로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한편으로 보면 둔한 감각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최적화되어 있고,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많은 자극들로 인해 더 불리하게 작용하는 곳일 수 있다.
과거 지금보다 자극이 덜한 시대에 이런 예민한 성향은 생존에 있어 여러 이점이 있었다. 전염병이 돌던 시절과 살육이 난무하던 시절 불안과 우울증을 일으켜 실내에 웅크리게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생존 가능성을 높였을 수 있고, 이런 성향을 잘 활용해 예술적, 학문적, 철학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이들 중 종교 활동에 적극적이거나 시대의 아픔을 여러 방식으로 쓰다듬으려 노력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약자들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그러한 기여들을 통해 이같은 예민한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다만 현대에 와서 예민하고 쉽게 불안해지는 성향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비와 우박, 폭풍우가 몰아치는 속에서 단단한 방수 껍질을 갖고 있는 생물체는 끄떡 없이 자기 일 열심히 하며 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껍질도 없이 보드랍고 물에 쉽게 젖는 피부를 그대로 드러낸 생물체는 쉽게 몸이 망가져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에 넘쳐나는 수많은 자극과 정보들을 비와 우박, 폭풍우로 보면, 전자의 생물체 즉 보통의 평범하고 둔한 사람들에겐 아무 문제 없는 지금의 사회가 후자의 생물체 즉 예민한 사람들에겐 쉴새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민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지금의 시대를 자신의 에센스를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을 최대로 얻으며 살 수 있을까?
우선,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뇌의 쾌락 중추가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과한 자극에 쉽게 망가질 뿐 아니라 망가진 쾌락 중추 회로를 회복시키는 생물학적 적응 과정에서 쉽게 무언가에 중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세상엔 흔히 말하는 짧고 강렬한 도파민적 쾌락을 일으키기 위한 수많은 것들이 널려 있다. 성적 쾌락, 권력 행사와 인정 욕구로 인한 쾌락, 자극적이고 달달한 음식에 의한 쾌락, 물질적 보상에 의한 쾌락 등등. 그리고 도피만적 쾌락은 생물로서의 본래 목적 즉 생존과 번식 성공 행위나 결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세상인 그런 쾌락을 아무리 즐겨도 지치지 않는 뇌신경세포를 가진 사람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쾌락을 꾸준히 즐겨도 뇌에 별다른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
뇌신경세포가 충분히 둔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오히려 자극적인 쾌락을 좇는 것이 인생의 행복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돈과 권력, 인정 욕구와 통제욕을 채울 수 있는 행위들, 성적 쾌락 등등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렇게 계속 추구해도 그다지 삶이 괴롭거나 공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강렬하고 더 강한 쾌락을 추구할수록 더더욱 행복의 지속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쾌락 탐닉 행위가 모두의 인생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쾌락 탐닉으로 인해 삶이 쉽게 공허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은 소수, 즉 예민한 사람들에 불과할 여지가 크다.
어떻게 보면 그로 인해 예민한 사람들은 현대 사회를 살면서 쉽게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모두가 더 강렬한 쾌락,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부으며 나가는데 왠지 그 속에서 혼자 동떨어져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모든 행위들이 다 공허하고 심지어 허무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저렇게 즐겁게 쾌락을 누리며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지? 왜 어울리지 못하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상황이다. 게다가 예민한 사람들이 실제로 소수고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둔한 뇌신경세포를 갖고 산다면, 그런 소외감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착각이라고 한 이유는, 실제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보통의 둔한 사람들과 예민한 사람들은 뇌신경세포의 작동 방식이 다르고, 따라서 인생 전반에 걸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남에 대한 이야기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다수와 어울리고 싶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뇌신경세포를 가진 보통의 사람들과 자꾸 어울리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면서 끊임없이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불안'의 저자 알랭 드 보통 역시 세상의 소수 예민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 뿐이 아닌가 싶다. 보통의 둔한 사람들은 자기에게 맞지 않는 더 큰 욕심, 더 큰 욕망을 추구한다고 해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만큼 뇌신경세포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의 불안 이론이 적용되는 것은 소수의 예민한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같은 설명에 따르면, 예민한 사람들은 뭔가 단단히 손해를 보는 것 아닌가? 보통의 둔한 사람들은 마음껏 쾌락을 누리고 아무리 큰 자극적인 것들을 추구해도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을 조금만 추구해도 금새 뇌신경세포가 망가져 제대로 쾌락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쉽게 중독에 빠지는 예민한 사람들은 애초부터 불공평한 삶을 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위 가설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불공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욱 유리한 부분도 있다고 하겠다. 어차피 세상의 원리는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것,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과도한 도파민적 쾌락을 조금도 추구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과 가급적 멀리 할수록 더더욱 지속적인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다시말해 애초에 현대사회의 과다한 자극적 쾌락들을 얻기 위해 에너지나 비용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과도하게 몸을 갈아 넣을 필요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돈을 벌려고 아득바득 살 필요가 없으며, 그저 자기 머리 속 안의 세계를 잘 구축하는 것에만 신경쓰고,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거의 무시하고 그저 띄엄띄엄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해서 사는 것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만족스럽게 잘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우선 쉬운 이해를 위해 음식과 관련해서 시작해 보자. 더 자극적인 음식, 더 맛있는 음식은 예민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강렬한 쾌감을 주지만, 그만큼 이들의 뇌신경세포를 금방 지치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음식에 쉽게 중독되게 만든다.
중독이 된다는 말은 흔히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중독은 그 중독 물질이나 행위로 인해 기쁨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더이상 그로 인한 충분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다. 비유를 하자면, 평상시 가만히 있을 때의 행복 상태를 0 level 이라고 해보자. 만약 어떤 쾌락을 주는 음식이나 물질, 행위를 통해 큰 쾌락을 느낄 때 그 상태를 5~10 level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때 건강한 마음 상태에서는 보통 때의 행복 수준이 0 level이었다가 즐거운 대상을 누릴때 5~10 level로 뛰어 오른 후 다시 0 level로 돌아온다. 이 때 0 level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뇌의 쾌감 회로 (행복 회로)는 5-10 level을 유지할 수 없는데, 이렇게 유지될 경우 몸의 건강 밸런스에 이상을 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애초에 지속적인 행복 상태에 머무를 경우 마치 과거 아편 전쟁 시절 아편에 몰두하는 사람들처럼 생명활동을 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독된 상태는 바로 이같은 뇌신경세포가 제기능을 잃은 상태다. 즉 중독되기 전 평범한 상태의 행복 수준을 0 level 이라고 하면, 중독이 될 경우 평범한 상태의 행복 수준이 -5 ~ -10 level 즉 마이너스 상태로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가만히 있을 때도 행복 수준이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상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 상태, 존재하는 매 순간이 괴로운 상태라는 말과 같다. 이 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으로 쉽게 사거나 간단한 행위로 짧고 강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가만히 있는 것도 괴로운 상태에서는 오랜 시간 끈기 있게 노력을 하거나 인내심을 통해 성취를 이루는 식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은 너무 괴로워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이 단발적 쾌감 대상을 흔히 '도파민 쾌락' 이라고 부르는데, 실은 도파민은 이처럼 부정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도파민은 쾌감 뿐 아니라 기억과 학습, 행동 등 수많은 활동에 작용하지만, 아무래도 만성적으로 단발적 쾌락에 중독된 상태를 다룰 때 딱히 대체해서 사용할 단어가 없어서 도파민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사용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중독 상태에서 중독 대상을 추구할 때는 고작해야 이 -5 ~ -10 level 의 행복 수준을 0이나 그보다 조금 높은 수준으로 올리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는 말 그대로 뇌신경세포가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상태로 망가졌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을 할 때, 맨 처음 그 마약으로부터 느끼는 쾌감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게 되는데, 첫 마약 시도때 이미 뇌신경세포가 비가역적으로 변해버려서, 평소의 행복 수준값 역시 영구적으로 마이너스 값을 갖도록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행복 수준이 0 level일 때는,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지루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상태에서 굳이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평상시의 행복 수준이 마이너스 상태일 때는 계속해서 정상 상태로 돌아오기 위해 끊임없이 중독 대상을 찾게 된다. 술이나 담배같은 기호식품에 중독 되거나 문란한 성생활, 자극적인 영상, 그 외 수많은 쾌락 행위들에 중독된 것은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 뿐 결코 온전한 행복에 이르진 못한다.
세상의 수많은 자극적이고 맛있는 음식은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예민한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중독을 일으켜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예민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불안에 들어서거나 만성적인 불만족인 상태에 빠질 경우, 즉 뇌신경세포의 기본 행복 세팅값이 마이너스 레벨인 경우 자꾸만 맛있고 자극적인 음식으로 그 불만족을 해소하는 욕구가 생기기 쉽다. 이로 인해 음식 중독에 이르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예민한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음식을 멀리하고 아주 단순하게 식사를 하는 것, 그리고 굳이 배고플 때가 아닌 이상 식사를 하지 않는 것, 식사를 해도 소식을 하는 것을 지킬 때 오히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오해하기 쉬운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사는 것은 인생을 구성하는 행복의 많은 것을 놓친다' 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매우 그럴듯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자극적인 음식에 중독된 상태라는 의미다. 중독된 상태에선 그 중독 대상이 없으면 불행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위에 언급했듯 평상시 행복 수준이 마이너스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자극적인 음식 없이는 평상시에도 끊임없이 괴로움을 느끼므로 마치 그런 자극적인 음식을 끊으면 인생의 수많은 행복을 놓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형적인 중독 증상으로, 만약 평소의 행복 수준이 0에 가깝다면, 그런 음식을 먹는 것도 좋고 먹지 않아도 큰 문제 없는 것으로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뇌신경세포의 관점에서는 가장 정상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세상엔 자극적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도, 건강한 식사만으로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 흔히 건강식은 맛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결국 자극적인 음식에 중독된 사람들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일 따름이다. 한국의 맵고 짜고 단 음식을 입에도 못대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엄연히 많다.
음식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이처럼 외부에서 오는 강렬한 자극을 가급적 멀리하고, 스스로 구축한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여러가지 성취를 통해 흔히 말하는 지연된 도파민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좋은 전략일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섬세하고 취약한 뇌신경세포를 보호하고 잘 길들이기 위한 전략을 뜻한다. 나는 명상을 비롯해 동양의 불교 수도승들의 오랜 기간의 수행, 자기만의 예술과 학문 세계에 깊이 천착하는 예술가와 학자들, 내면의 세계와 세상의 이치를 탐구해온 철학자들이 바로 이를 실천해온 것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들의 철학과 실천적 행위들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결국 평생 공부를 하든 기술을 갈고 닦든 창작을 하든 몰두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몰입'의 개념과 만나게 되는데, 많은 이들은 이미 일찍부터 이를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인간의 수많은 활동들이 가치 없어진다는 전망들이 만연해도, 매일같이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량과 감각 기관들을 자극하는 수많은 자극원들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고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전략을 훌륭히 실천하고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전략의 핵심은, 타고난 운명 즉 취약한 뇌신경세포를 갖고 태어난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전략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거나 결국 언젠가 빛을 보는 결과를 답보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인 성취는 오히려 자극에 둔한 평범한 사람들이 더 잘 계획하고 더 잘 실천해서 이루어내기 쉬운 것이다. 예민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주어진 운명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소 다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