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 동기 중에 꽤 예쁜 친구가 있었다. 대학 오기 전 무용도 배웠다고 하는데 키도 크고 늘씬하기도 해서 과 내에서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이 친구(이하 M)는 학기 초부터 다소 성격이 시니컬했다. 도도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약간 부정적인 말투를 쓰는 그녀는, 학기 초 동아리 모임이나 과 모임 여기저기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선배들에게 꽤 관심을 받았다.
어느 날,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뒤풀이 장소로 가던 중이었다. 보통 뒤풀이를 갈 때는 여럿이 가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조금 더 편한 사람들 혹은 먼저 친해진 사람들끼리 둘셋씩 짝지어서 가기 마련이다. 나도 막 친해진 몇몇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서 걷던 여학우들 몇 명이 다소 큰 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들렸는데, 이게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 주 내용이 바로 '약대 동기 남자들이 별로고, 이성적 매력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걷던 남자 동기들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몇 마디 말들이 오갔는데, 그 가운데에서 M의 말 한마디가 유독 크게 들렸다. 굉장히 시니컬한 말투로.
"약대에 남자 없잖아?"
M의 앞뒤로 남자 동기와 선배들 몇 명이 가까이 걷고 있었는데 뭔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한 M..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음, 왜 굳이 저런 말을 저렇게 크게 하지?'라고 느꼈던 것 같다. 어쨌든 M의 말이 끝난 뒤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M 옆의 여자 동기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표했고, 앞뒤로 걷던 남학생들은 말을 멈추고 먼 산을 보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M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대학원을 가서도 계속해서 우리 과 남자들만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선배, 동기, 후배를 가리지 않고 두루 만났다. 아마도 여자 선후배와 동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가장 오랫동안 우리 과 약대 남자들만 골라서 사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결혼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과 했지만. 워낙 다양한 약대 남자들과의 인연이 있어서 몇 명만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M의 연애사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특히 어떤 특정 시기 동안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콤모두스 황제 사후 로마에서 1년에 5명의 황제가 난립했던 것처럼 그녀의 남자 친구가 계속 바뀌었고, 그것도 약대 남자들 중에서만 집중적으로 바뀌어서 한동안 M의 그런 문어발식 연애 이야기가 졸업한 동기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어떤 사회 심리학 연구에서 싱글 남녀들을 상대로 스피드 데이트 행사를 진행했다. 사전에 먼저 각자가 원하는 이상형의 성격이나 가치관, 외모 등 조건들을 기입하게 했다. 연구의 목적은 머신러닝 기법을 사용하여 설문 데이터를 토대로 이들 남녀가 서로 만났을 때 실제로 각자 어떤 이성에게 끌릴 것인지 예측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머신러닝 모델로도 예측에 실패할 만큼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이 선호하는 이성의 조건과 실제 만남 후의 호감은 달랐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사람들의 선택과 관련된 신경학적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때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어서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그것을 선택한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의 뇌에서는 조금 다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될 경우, 단순히 선택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그 대상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질 수 있는데, 이 변화가 신경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수치로 측정되었다는 것이다. M이 약대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그들이 형편없다고 느꼈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그런 편견이 완전히 깨져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마케팅 업계에서는 설문 형식으로 조사한 소비자 선호도가 실제 상품 및 서비스 선호 현상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마케팅 무용론들이 심심치 않게 회자되곤 했다.
M이 결혼한 후, 언젠가 그 친구를 만나 근황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던 M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아이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보기에도 그녀는 화려한 삶을 즐길 타입처럼 보였고, 실제로 한때 M은 앨범을 내고 무대 위에 서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관련 분야를 알아본 적도 있었다고 했다.
흔히 인생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걸 해석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 것이 진심으로 내가 원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생각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생각했던 것들 모두가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들이 아닐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고, 미래에 내가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 것인지 섣불리 확신할 필요도 없다.
REFERENCES
Izuma, K., Matsumoto, M., Murayama, K., Samejima, K., Sadato, N., & Matsumoto, K. (2010). Neural correlates of cognitive dissonance and choice-induced preference change.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7(51), 22014-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