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 내가 처음 약국에서 근무했을 때는 액상 진통제가 흔하지 않았다. 액상 진통제란, 투명한 젤리 같은 껍질에 액체 형태로 담겨 있어, 약을 먹으면 위와 소장에서 겉의 젤리가 분해되고 그 안의 액체에 녹아 있던 진통제가 빠르게 흡수되는 진통제를 뜻한다. 주로 이부프로펜이나 덱시부프로펜처럼 염증을 가라앉히고 열을 낮춰주는 기전을 가진 진통제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쓰이는 'NSAIDs' 계열의 약들 — 흔히 "소염 진통제 주세요", "해열제 주세요"라고 할 때 약사들이 많이 건네는 거의 모든 해열 진통제가 이 범주에 속한다 — 을 액상으로 많이 포장한다.
보통 한 성분의 소염 진통제 하나가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다양한 통증 질환에 두루 쓰이는데, 이는 알고 보면 우리 몸에서 통증과 염증을 일으키는 기전이 사실상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결국 한 종류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액상으로 만들든 어떤 제형으로 만들든, 그 안에 든 진통제 성분은 일단 흡수되면 몸 전신 구석구석으로 들어가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같은 성분이 든 진통제라면 모두 같은 효과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게 이론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부분은 특히 제약회사와, 처방하는 의사와, 조제하는 약사 사이의 민감한 대립 쟁점이 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니 접어두자. 아무튼 흔히 쓰는 진통제 성분도 액상으로 만들든 딱딱한 정제로 만들든 캡슐로 만들든 이론적으로는 효과가 비슷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마다, 증상마다, 질환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약을 감싸는 제형을 만드는 데 쓰이는 부가 재료와 우리 몸 조직 사이의 궁합 차이, 약마다 흡수되는 부위가 미묘하게 다를 뿐 아니라 흡수량도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런 미세한 차이가 이론과는 별개로 실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 그 밖에 알 수 없는 몸의 다양한 차이들이 관련되어 있다.
그때 처음 일했던 약국에서 나를 잘 가르쳐 주신 약사님은 제주도 출신 여약사님이셨는데, 무척 꼼꼼히 가르쳐 주셨다. 당시 액상 이부프로펜 진통제였던 어느 제품이 특히 생리통에 잘 듣는다는 임상 정보(?)도 알려 주셨는데, 그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학술적 근거로 비교한 자료는 없고, 대개 그런 일반의약품은 알음알음 경험담으로 정보가 도는데, 약사님이 그동안 단골손님과 지인들에게 이것저것 권해 본 결과 그 제품이 특히 생리통에 잘 듣는다는 일관된 반응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잘 기억해 두기로 했다. 처음 약사로 일하던 그 시절에는 의욕이 넘쳤던 만큼, 잘 듣는 약을 권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에게 생리통 약을 물어보는 손님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칠 무렵의 시간에 여고생 세 명이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고 나는 학생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시간엔 마침 약국에 나 혼자뿐이었는데, 다른 약사님들이 모두 나에게 약국을 맡기고 아주 잠깐 바깥일을 보러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 여고생은 나를 보고, 또 서로를 보며 쭈뼛거리고 있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생리통 약 사러 왔는데요……" 하고 말했다.
순간, 그 여약사님이 가르쳐 주셨던 바로 그 생리통 약 — 액상 이부프로펜의 그 제품, 지인들과 단골손님을 통해 검증이 끝났다던 그 진통제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 생리통! 자, 이 약이 잘 들어요."
그러면서 약을 건넸더니, 여고생들이 또 서로를 본다. 그러더니 되물었다. "이거 잘 들어요?" 나는 역시 또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흡수가 빨라서 생리통에 아주 효과 좋아요. 아픈 게 금방 나을 거예요."
여고생들은 다시 서로를 본다. 그러더니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나는 순간, 왜 웃지?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아닌데? 하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녀들은 두 통을 더 달라고 했고, 나는 더 드렸고, 그렇게 계산이 끝났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때까지도 뭐지? 뭐가 이상한 거지? 궁금했지만 끝내 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느낀 어떤 께름칙함이 남아서인지, 그 장면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참, 마치 내가 직접 겪어본 것처럼 너무 자신 있게 말했으니…… 그때 느낀 그 께름칙함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을 두고 확신에 차 말했다는 데서 온 찝찝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 여고생들도 너무 자신 있게 말하는 남자 약사인 나를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을 저렇게 확신하며 말한다고?
그 뒤로 시간이 한참 흘러 치과의사가 된 뒤, 지금까지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치아를 신경치료 했고, 수없이 많은 치아를 발치했고, 임플란트를 심어 왔다. 그러나 정작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신경치료를 받아본 적도, 내 사랑니를 뽑아본 적도, 내 잇몸에 임플란트를 심어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좀 따끔할 겁니다", "뻐근하게 아파요", "네, 하루 이틀은 아플 거예요"라고 수없이 말해 왔다. 하지만 나는 그 통증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처방한 소염 진통제를 복용했을 때 통증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이론으로만 알 뿐 실제 감각은 전혀 모른다.
다른 사람의 몸에 의료적 처치를 행하는 사람은 — 어떤 직업이든 — 그래서 늘 겸손해야 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암 전문의라 해도, 암에 걸려본 적이 없다면 암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접 처치를 하는 수많은 보건 의료인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환자를 대할 때가 많고, 그것이 결국 환자의 기분을 불필요하게 상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말이 통하지 않는 꼰대로 보이게 만드는 결과를 낳곤 한다.
지금도 가끔, 첫 약국에서 생리통 약을 여고생들에게 건네던 그날의 장면이 떠오른다. 생리통이 어떤 것인지 평생 알 수 없는 내가 "금방 나아요"라며 그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했으니, 겪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확신하는 모습이 그녀들 보기에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 웃음의 의미를,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