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도 서양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이 동물적인 본능과 감정적인 부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나 재난 같은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인 모습, 조금만 불안하거나 힘든 일이 닥쳐도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그런 가정이 틀렸다는 반박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뇌에서 가장 동물적인 부분인 변연계가 이성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이미 밝혀냈고, 그 후 이런 논쟁은 더 이상 중요하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국가 정책, 소비자의 생각을 바꾸는 기업 마케팅, 개인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심리적 개입이나 자기 계발 이론들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이성적 사고나 합리성에 호소하지 않고, 주위 환경이나 사회 구조,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 역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법과 공권력이 힘을 발휘하지 않는 곳에서는 상처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잔인하게 학대하고 죽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다. 지금도 사실상 법이 무력화된 전쟁터에서는, 평화를 위한 인류의 수많은 노력이 무색하게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폭력과 살인이 행해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는 이유는 결국 어마어마하게 쏟아붓는 국방비와 치안 유지비 덕분이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의 근본적인 공격성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리적인 폭력은 막혔지만, 법망을 피해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가할 방법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그런 폭력은 사회에서 만난 남남 사이에서뿐 아니라 가족, 친구,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지인 사이에서 오히려 더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공격성은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선의를 갖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한 일이 상대방에게는 엄연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타인을 공격하고 다른 조직과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 타고난 삶의 방식인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언뜻 수많은 이들에게 피해만 끼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인류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 공격성이 결국 세상을 개척하고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며 전체의 부를 늘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이득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공격성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어떻게 시스템을 만들 것인지, 동시에 그들 스스로의 만족을 극대화하면서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한다 해도 현실에서 그런 시스템이나 구조가 완벽하게 만들어지기는 어렵고, 유지되기는 더욱 어렵다.
어떤 사람이 나를 이유 없이 공격했다면, 혹은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잘잘못의 정의가 무엇이냐를 따지기 이전의 문제다. 그는 그저 그렇게 태어나 자신에게 맞게 살아왔을 뿐이고, 결코 완벽히 밝혀낼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나와 충돌이 빚어진 것뿐이다. 어느 쪽이 더 잘못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법적 분쟁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실은 그 법적 결론조차 실체를 정확히 담아낸다고 보기 어렵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한다면, 왜 그 사람이 그랬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변화시킬까를 고민하는 것보다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인간의 지능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것이 밝혀진 것처럼 보이지만, 언어 능력과 수학적 문제 풀이 능력 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능이 많다. 측정하기 어려워서, 어쩌면 과학적 방법론으로 인간의 모든 지능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성적 지능보다 수십만 년, 어쩌면 수백만 년 동안 발달해 왔을 지능 —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본능적인 지능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고감도로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은 우리의 직감, 한마디로 '기분'이라고 쉽게 표현하는 것에 녹아 있다. 다만 우리는 사회생활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이를 무시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저 사람 쎄하다', '저 사람과 대화하면 기분이 별로다'라는 말은 대단히 오만하고 형편없는 사람의 말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당사자에게는 그 느낌과 기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일 수 있다.
지금처럼 매일 SNS와 소셜 미디어, 수많은 사람과의 접촉 등 과도한 자극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직감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본래 사람은 주변 환경에 잘 휘둘리도록 만들어졌고 그 덕분에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을 수 있지만, 지금 시대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애초에 일생에 걸쳐 이토록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도록, 또 이토록 많은 사람을 기억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서로 신뢰하기도 힘들고, 스스로도 제대로 된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어느 종교적 가르침이나 고대 현자들이 남긴 삶의 지혜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그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사실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모습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최선이며, 모두가 각자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나 행동 변화로 바꿀 것이 아니라 그저 거리를 두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 있다.
그러니 결국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직감은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애써 헤아리지도, 그 사람을 바꾸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앞서 말했듯 그 사람을 바꾸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그 사람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유를 캐묻고 관계를 고치려 하는 대신 조용히 거리를 두는 것 — 그것이 그 사람을 미워하는데 내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그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나를 지키는 길이다. 미워하지 않으면서 멀어지는 것, 탓하지 않으면서 물러나는 것. 이 둘은 모순이 아니다.